[이젠, 우주]‘한국판 NASA’ 항공우주청, 대전·경남 힘겨루기에 매몰…권한 축소 우려

우주 기술 경쟁은 국가 방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나라 간 ‘패권 다툼’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우주산업은 미국과 소련이 냉전기 때 체제 경쟁의 상징으로 삼으며 발전해왔죠. 현재 우주 기술 개발은 과거와 달리 민간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시장성이 열린 우주산업의 국내외 소식을 알기 쉽게 소개합니다.


누리호가 2021년 10월 21일 오후 5시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되고 있는 모습.(사진=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판 NASA(나사·미국 항공우주국)’로 불리는 항공우주청의 신설이 차기 정부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해당 기관의 설립은 우주산업 진흥 컨트롤타워 부재로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으로 여겨져 과학기술계 숙원 사업 중 하나로 꼽혀왔다. 그러나 유치 장소를 두고 대전·경남을 중심으로 지역감정이 고조되고 있어 역할·기능·권한이 당초 기대보다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일 관가에 따르면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대통령직인수위)는 항공우주청의 설립 지역을 포함해 기관 신설을 위한 검토 절차를 진행 중이다. 항공우주청 신설은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시절 지역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지난 1월14일 윤 당선인은 경남 창원 방문 중 “서부 경남에 한국의 나사를 만들어 항공우주산업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종합 공약집을 통해선 ‘국방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방위사업청·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등 부처별로 흩어진 우주 정책을 총괄할 컨트롤타워를 신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윤 당선인의 공약 발표 이후 대전 정치권·과학기술계 단체 들이 시위에 나서는 등 반발이 이어졌다. 이들은 항공우주연구원·천문연구원·국방과학연구소 등 우주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비롯해 40개가 넘는 우주산업 업체가 대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효율성 측면에서 항공우주청이 대전에 설립돼야한다는 주장이다.

항공우주청 유치전은 3월9일 대선 이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경남 소재 항공우주기업 73개는 최근 ‘항공우주청의 서부경남 설치’를 촉구하는 건의문을 대통령직인수위 등 14개 기관에 전달했다.

대통령직인수위 역시 경남 사천시에 항공우주청 설립을 유력한 안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KAI·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국내 선두 우주기업이 경남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경남도 발표에 따르면 우주산업 분야 생산액의 43% 수준을 경남이 담당하고 있다. 하병필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은 지난달 28일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을 찾아 ‘항공우주청 서부경남 유치’의 뜻을 전하며 유치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사천 항공우주청 설립에 무게가 실리자 대전 지역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대전시의회는 지난달 30일 만장일치로 채택한 결의안을 통해 “항공우주청을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며 국내 최고의 우주 관련 인프라를 갖춘 대전에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태정 대전시장도 지난달 31일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만나 항공우주청 대전 설립이 새 정부 국정과제로 반영될 필요가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 안 위원장은 대선 후보 시절 “대전 지역의 국방과학연구소·항공우주연구원·한화 등의 연구역량을 융합한 ‘우주 국방 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두 지역의 여론전 역시 치열하다. 대전일보·경남일보 등 지역 언론사들은 연일 사설과 기사를 통해 각 지역에 항공우주청을 유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차·포 뗀 항공우주청 설립 ‘우려’

이처럼 과학기술계 숙원 사업인 항공우주청 설립이 지역감정에 매몰되는 모습을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우주 기술은 국가 방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주산업은 미국과 소련이 냉전기 때 체제 경쟁의 상징으로 삼으며 발전해 왔는데, 우리나라는 이 경쟁에 비교적 늦게 참여한 ‘후발주자’다. 이 때문에 세계 경쟁을 따라가기 위해선 효율적인 거버넌스 구축의 필요성이 지속해서 제기돼 왔다.

국내 항공우주 거버넌스는 크게 심의·정책·연구개발 분야로 나눠진다. 위원장이 과기정통부 장관에서 국무총리로 격상된 국가우주위원회에서 심의를 담당하고 있다. 다만 이 기관은 상설 운영되는 기구가 아니라 한계점이 명확하다. 정책 분야는 과기정통부·국방부로 나뉜 상태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항공우주연구원으로 대변되는 연구개발 분야 역시 상위 기관들이 많아 자율성 보장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우주산업 후발주자’인 우리나라가 선도국들을 추격하기 위해선 거버넌스 효율성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논의가 지역감정에 휩쓸려 주춤하고 있단 지적이 제기된다.

국가우주위원회 구성.(자료=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익명을 요구한 한 우주산업 분야 연구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항공우주 산업은 국방은 물론 차세대 먹거리와 직결돼 경쟁력 확보가 시급한데, 현재 구조에선 불필요한 절차가 많아 의견을 통일할 수 있는 기구(컨트롤타워) 마련이 절실하다”며 “권한과 기능이 확실하고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항공우주청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다만 정작 필요한 사안의 논의는 지지부진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역감정에 매몰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항공우주청 운영 계획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러다간 지역 갈등에 차떼고 포뗀 항공우주청이 신설돼 숙원 사업이 좌절될까 우려가 크다”고 토로했다. 대전·경남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차기 정부가 항공우주청에 최소한의 역할을 부여하는 식의 ‘악수’를 둘 수 있다는 우려다.

항공우주청에 대한 기능과 관련해선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노동조합이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이들은 지난 3월21일 성명서를 내고 차기 정부에서 국무총리실 산하 우주처가 설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우리나라 우주 관련 부처의 비전문성과 이기주의가 국익을 훼손할 지경에 이르렀다”며 “가장 핵심적인 우주 주무 부처인 과기정통부와 국방부가 협업에 실패하고 있고 국방부 내부는 우주를 놓고 육·해·공군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우주 기술을 개발할 조직과 거버넌스, 사업 계획·민군 협력 방안·국제 협력을 총괄하고 추진할 주체가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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